1. 감독 소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현대영화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1962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후,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였으며, 이는 이후 극영화로 전환한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대부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으며, 극적인 갈등보다는 조용한 정서의 파동과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머니를 잃은 이후 직접 겪은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모와 자식 간의 오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풀어냈습니다. 이 영화는 그가 평소 추구해 온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내외에서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향을 받은 미장센과 정적인 카메라워크, 식사 장면의 정서적 밀도 등은 고레에다 감독의 서정성과 철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은 실화에 기반한 다큐멘터리적 사실성 위에 정제된 서사와 감정의 흐름을 얹어, 고레에다 특유의 섬세하고 절제된 연출을 보여줍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향을 받은 정적인 카메라워크와 ‘먹는 장면을 통해 감정을 전하는 방식’은 이 영화에서도 두드러집니다. 고레에다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왜 전달되기 어려운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상실을 기억하고 극복해 가는지를 영화 전반에 걸쳐 차분하게 탐구합니다. <Still Walking>은 그러한 질문에 가장 깊고 개인적인 응답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2. 등장인물 소개
<Still Walking>의 인물들은 단순히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세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중심에는 요코야마 가족이 있고, 이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인물 간 긴장과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아버지 요코야마 쿄헤이입니다. 그는 은퇴한 의사로, 집안의 가장이자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단단한 사람이지만, 정작 감정 표현에는 인색하고, 가족과의 대화에서도 일방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큰아들이 생전에 의사의 길을 걸었고, 자신이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사실은 남은 가족들, 특히 둘째 아들 료타와의 관계에 묘한 긴장을 만듭니다. 그는 료타를 눈에 차지 않는 존재로 대하며, 아버지로서의 애정보다 실망감이 우선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 토시코는 그보다 훨씬 적극적인 태도로 가족을 이끌며, 일견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그 이면에는 깊이 눌러둔 감정이 엿보입니다. 특히 죽은 큰아들의 자리를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그를 구했던 소년에게도 매년 찾아오게 하여 미묘한 죄책감을 유도합니다. 이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료타는 현재 미술품 감정사로 일하지만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 재혼, 아이가 아닌 양아들과 함께 하는 삶 등 부모가 바라는 ‘성공한 아들’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가족 모임에서도 그 거리감을 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부모와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품고 있기에, 그 이중적인 태도는 료타를 더욱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만듭니다.
유키는 료타의 아내로서 부드럽고 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남편의 가족 내 분위기와 알게 모르게 부딪히며 그 차이를 느낍니다. 특히 자신이 데려온 아이가 친손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머니 토시코와의 관계에서도 미묘한 긴장을 겪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츠시는 유키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가족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순수함과 관찰자의 시선은 어른들의 감정적 벽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듯 각 인물은 하나의 상징이 아닌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조용한 드라마 속 깊은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3. 줄거리
<Still Walking>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일본의 어느 여름날, 요코야마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하루는 지난 시간 동안 이 가족이 겪은 상실과 감정을 응축한 하루이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파동이 일어납니다.
가족이 모인 이유는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준페이는 어린 시절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이 가족의 감정적 균형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후 요코야마 부부는 매년 같은 날 가족을 초대하여 그를 추모하는 의식을 치릅니다. 둘째 아들 료타는 아내 유키, 유키의 전 남편 아들인 아츠시와 함께 부모 집을 방문하지만, 그 분위기는 애틋하면서도 어색합니다.
이 하루 동안 가족은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가며, 소소한 일상을 나눕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서로가 하지 못했던 말들과 감정의 균열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고 무뚝뚝하게 대하며, 어머니는 미묘한 말투로 아들의 선택과 삶을 평가합니다. 특히 큰아들을 구한 당시의 소년이 방문했을 때, 어머니의 태도는 충격적입니다. 그녀는 그를 매년 불러내어 감사보다는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듯한 행동을 보이며, 그 상처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 것임을 암시합니다.
료타는 부모 집에서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이 가족이라는 뿌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료타가 자신의 아이와 함께 무덤을 찾아가는 모습은 제목인 "Still Walking"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록 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걷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와 함께 그 길을 이어갑니다. 이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무겁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 감상평
<Still Walking> 은 영화적 사건이 거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단지 하루 동안의 가족 모임을 통해, 세대 간의 단절과 오해, 상실에 대한 애도, 그리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의 형태를 조용히 풀어냅니다. 이 영화는 말보다 시선, 대화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의미가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관객으로서 이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은 마치 타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그렇기에 더욱 감정적으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일본식 가족 문화와 전통의 무게는 이 영화에 깊이를 더하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여전히 과거를 놓지 못하는 부모 세대와, 그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식 세대의 간극은 전 세계 가족들에게 공통되는 주제로 다가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화려한 플롯이나 극적인 반전 없이도 얼마나 강한 감정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특히 식사 장면과 산책 장면은 단순한 일상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쌓인 감정과 의미는 한 장면 한 장면이 곧 하나의 인생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Still Walking> 은 가족이라는 관계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지 않은 세계. 그래서 이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문득 나의 가족은 어떠했는지, 내가 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는지를 되묻게 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는 여운,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사회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감정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작품입니다. 상을 화려하게 수상하진 않았지만, 그 서정적 깊이와 현실감, 연출력은 세계 영화계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 중 가장 정제된 표현력을 가진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조용한 여운이 긴 시간 동안 남는 영화입니다.